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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슬롯머신이다

AI 슬롯머신

요즘 AI로 뭔가를 만드는 영상을 보다 보면 가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AI한테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을 만들어달라고 해봤습니다.”

그리고 20분 정도 지나면,

“어? 진짜 되는데?”

하면서 게임 하나가 나옵니다.

그러고는 다시 말합니다.

“이번에는 발로란트 같은 걸 만들어달라고 해보겠습니다.”

또 뭔가가 나옵니다.

“와, 이것도 되네?”

그런데 저는 이걸 보고 있으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AI가 이렇게까지 발전했는데,

우리가 AI를 사용하는 방식은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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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가 처음 나왔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그때는 AI가 지금처럼 잘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림을 하나 만들어도 손가락이 이상하고,

코드를 짜달라고 하면 엉뚱한 부분에서 오류가 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프롬프트를 조금씩 바꿔가며 계속 시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런 사용법이 꽤 자연스러웠습니다.

“한 번 더.”

“조금 다르게.”

“이번에는 좀 더 예쁘게.”

“아니야. 다시.”

결국 마음에 드는 결과가 하나 나올 때까지 계속 돌리는 겁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AI를 슬롯머신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레버를 당기면 결과가 하나 나오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당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오, 이거다.”

하는 결과가 나오면 멈춥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AI가 엄청나게 좋아진 지금도 이 모습이 꽤 많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제는 AI가 너무 잘 만들어주다 보니,

슬롯머신의 판돈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괜찮은 그림 하나가 나오면 잭팟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게임 하나 만들어줘.”

가 되어버립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 만들어줘.”

“이번에는 발로란트 같은 게임.”

“이번에는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

그리고 그 결과가 나오면,

그걸 가지고 무언가를 완성하는 대신

또 다른 것을 시켜봅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을 만들어줘.”

라는 말은 굉장히 구체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사실 굉장히 압축된 말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이름 안에는

수많은 게임 시스템이 들어 있습니다.

맵 구조가 있고,

캐릭터 성장 방식이 있고,

아이템이 있고,

스킬이 있고,

전투가 있고,

라인이라는 개념이 있고,

팀 단위의 목표가 있고,

수많은 플레이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것.”

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리그 오브 레전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조금 극단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약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면 어떨까요?

누군가 저에게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을 만들어줘.”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아마 훨씬 길게 설명해야 할 겁니다.

“이런 구조의 맵을 만들고,

플레이어가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고,

각 캐릭터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팀은 이런 목표를 두고,

게임이 진행되면서 이런 식으로 선택지가 생기고,

최종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이런 경험을 주고 싶다.”

그제야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겠죠.


그러니까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을 만들어줘.”

라는 말에는 단순한 취향 이상의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해가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AI가 만들어주는 결과가 좋아지는 것과

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예를 들어 게임을 잘 만드는 사람이 AI에게 부탁한다면,

단순히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을 만들어줘.”

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게임의 어떤 구조가 재미있었는지,

그 구조에서 무엇을 가져오고 싶은지,

무엇은 버리고 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변형하고 싶은지,

플레이어가 어떤 감정을 느끼기를 원하는지,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은 AI에게 단순히 결과물을 주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AI를 잘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합니다.

물론 프롬프트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AI에게 일을 잘 시키는 방법도 중요하겠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리고 결과가 나왔을 때,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아볼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말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가?


AI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그림을 만들고,

훨씬 훌륭한 음악을 만들고,

훨씬 훌륭한 코드를 만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남는 일이

조금씩 바뀌는 것에 가깝겠죠.

AI가 결과를 만들어준다면,

사람은 그 결과를 보고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럼 뭐가 문제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살리고,

이 부분은 버리고,

이 부분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보자.”

라고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AI를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첫 번째는,

결과가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뽑는 것.

두 번째는,

지금 나온 결과를 가지고 계속 작업하는 것.

둘 다 AI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다음 결과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결과입니다.


저는 이것이 AI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AI는 우리의 가능성을 엄청나게 넓혀줍니다.

예전에는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한참 고민하고,

자료를 찾고,

코드를 짜고,

실패하고,

다시 만들어야 했던 것을

AI와 함께라면 굉장히 빠르게 여러 방향으로 시험해볼 수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오히려 저는 AI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럼 반대로 하면?”

“이 생각의 약점은 뭐지?”

“이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바꿔보면?”

AI에게 계속 다른 가능성을 던져보고,

그중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다시 그걸 가지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때 AI는 슬롯머신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을 엄청나게 빠르게 펼쳐주는 도구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많아진다고 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이 너무 많아지면

계속 다음 가능성만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괜찮은데,

저것도 괜찮고,

이것도 만들어볼 수 있고,

저것도 만들어볼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정작 아무것도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AI 시대에 가장 희귀한 것은

생성 능력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생성은 점점 싸지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선택하는 능력.

그리고

멈추는 능력.

그리고

하나를 붙잡고 계속 다듬는 능력.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AI가 이렇게까지 발전했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AI를 슬롯머신처럼 사용하고 있을까?

어쩌면 문제는 AI의 적중률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요.

AI가 형편없어서 계속 레버를 당겼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레버를 당기는 행위 자체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면

아마 흔한 AI 활용법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AI에게 잘 질문하세요.”

“결과를 검토하세요.”

“프롬프트를 잘 작성하세요.”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더 멀리 가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흥미로운 질문은

“그래서 AI로 뭘 만들 수 있느냐?”

가 아니라,

“AI 때문에 만드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변하는가?”

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AI에게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것을 만들어줘.”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어느 정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느 날,

AI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해서

정말로 웬만한 게임 하나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때도 우리는 계속

“이번에는 다른 게임.”

“이번에는 다른 그림.”

“이번에는 다른 음악.”

하면서 레버를 당기고 있을까요?

아니면

“좋아. 그럼 이제 이걸 가지고 나는 뭘 만들지?”

라고 생각하게 될까요?

그리고 만약 정말로 누군가가

AI를 이용해서 자기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쉽게 만들어진 것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요?

아이디어는 누구의 것일까요?

그리고 수많은 결과물이 세상에 쏟아져 나온다면,

사람들은 그것의 주인을 법으로 기억할까요?

아니면 그냥

“이건 저 사람이 처음 보여줬던 거야.”

라고 기억하게 될까요?

아마 다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