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와 기억 방식
기억력이 좋다는 건, 더 많이 기억한다는 뜻일까?
바둑 기사들은 기억력이 굉장히 좋다고 합니다.
대국이 끝난 뒤에 바둑판을 다시 복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오래전에 뒀던 대국의 수순까지 기억하는 경우도 있죠.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들은 정말로 바둑판 전체를 사진처럼 기억하는 걸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바둑판을 외우려고 한다면 아마 이런 식일 겁니다.
여기에 흑돌이 하나 있고.
여기에는 백돌이 있고.
저쪽에는 또 흑돌이 있고.
그러니까 바둑판 전체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머릿속에 저장하려고 하겠죠.
그런데 바둑 기사들은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바둑은 그냥 돌의 위치가 아니니까요.
어떤 돌은 공격을 위한 돌이고,
어떤 돌은 상대를 막기 위한 돌이고,
어떤 모양은 이미 익숙한 형태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여기에 검은 돌이 있다.”
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이런 수가 나왔다.”
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둑 기사들은 바둑판 전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바둑판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정보들을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합니다.
어제 지나간 길을 정확한 사진처럼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길가에 있던 모든 간판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시 그곳에 가면,
“아, 여기였지.”
하고 알아봅니다.
우리 기억에는 아마 모든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다시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기억이 비어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뇌가 다시 만들어내는 것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바둑 기사의 기억력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엄청난 용량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아닐까?
바둑을 오랫동안 두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모양이 의미가 있는지.
어떤 수가 이후의 흐름을 결정하는지.
그런 것들의 우선순위를 계속 학습해왔을 겁니다.
그러면 바둑판에 있는 수백 개의 정보를 모두 같은 무게로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구조 안에 묶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이건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과도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이 단어는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기억도 그렇고.
집중도 그렇고.
전문성도 그렇고.
심지어 재능도 그렇습니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전부 처리하는 것이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기 때문에,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다는 것도 조금 이상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정말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남들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남들보다 중요한 것을 잘 골라내는 사람일까요?
이 둘은 꽤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일상생활에서는 굉장히 잘 까먹습니다.
열쇠를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고.
약속을 깜빡하고.
어제 들었던 이야기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말하겠죠.
“쟤는 기억력이 별로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게임 이야기를 시작하면 달라집니다.
몇 년 전 패치 내용까지 기억하고.
특정 캐릭터의 능력치를 기억하고.
예전 버전과 지금 버전의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 구조를 외우고 있고.
어떤 사람은 역사 연도를 줄줄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음악을 한 번 듣고 구조를 기억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기억력이 나쁜 걸까요?
아니면 기억력이 작동하는 분야가 다른 걸까요?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생각이 나옵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정보에 대해 기억력이 좋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일상을 살아가니까요.
약속을 기억하고.
물건 위치를 기억하고.
사람 이름을 기억하고.
해야 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가 봐도 기억력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그 사람이 일상이라는 분야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상에서조차 계속 패턴을 만듭니다.
“지갑은 항상 여기에 둔다.”
“외출하기 전에 이것을 확인한다.”
“지난번에 이런 실수를 했으니 이번에는 이렇게 한다.”
이런 식으로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계속 특징을 뽑아내고 구조를 만듭니다.
그러면 일상 자체가 하나의 익숙한 분야가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어떤 상황이 반복되는지 알고.
어디를 기억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겠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일상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니까요.
새로운 자극도 아니고.
특별히 분석할 필요도 없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일상은 패턴으로 압축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그걸 어디에 뒀더라?”
가 되는 거죠.
물론 모든 건망증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억에는 수많은 원인이 있고,
병적인 기억 문제도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나는 왜 이렇게 깜빡깜빡하지?”
정도의 이야기라면,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 분야에 주의가 적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기억은 뇌의 다른 기능들과도 굉장히 닮아 보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전부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같은 수준으로 보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것.
위험한 것.
내가 찾고 있는 것.
관심 있는 것.
이런 것들에 더 많은 주의를 줍니다.
그리고 기억도 비슷합니다.
중요한 것.
반복되는 것.
의미 있는 것.
나와 관련된 것.
그런 정보가 더 강하게 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뇌는
모든 것을 저장하는 거대한 하드디스크라기보다는,
제한된 자원을 가진 시스템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용량은 한정되어 있고.
처리할 정보는 너무 많고.
그래서 결국 계속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반복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재능이라는 것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이유는
처음부터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분야에서 중요한 것을 계속 찾아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것을,
이 사람은 의미 있는 것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이 정보 하나로 보는 것을,
이 사람은 패턴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정보가 아니라 구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걸 보고,
“저 사람은 통찰력이 있다.”
혹은,
“저 사람은 재능이 있다.”
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바둑 기사는 정말 기억력이 엄청나게 좋은 걸까요?
아마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 기억력은 단순히
더 많은 돌의 위치를 저장하는 능력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오랫동안 바둑을 두면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배웠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배웠고.
무엇을 잊어도 되는지도 배웠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남들이 수백 개의 돌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은 하나의 흐름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기억력에 대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단순히 많이 저장하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내는 능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지능이라는 것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더 많이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에 가까운 것 아닐까요?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기억은 어쩌면,
저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택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