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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사회적 역할

술에 취한다는 것

술에 대해서 조금 독특한 생각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술을 마신다는 행위가 단순히
“술을 마시고 취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어쩌면 술자리는
사람이 서로에게 가면을 벗어 보이는 자리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 문장을 꺼내놓고 싶습니다.

하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생은 연극이다.”

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말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아주 단순합니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것.

같이 생활하고, 같이 일하고, 같이 지내면서
그 사람의 행동 패턴을 알게 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하는 걸 보니 지금 기분이 안 좋구나.”

“저 말을 하는 걸 보니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런 것들이죠.

이건 정말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상대를 오래 관찰하고, 경험하고,
그 사람이라는 인간을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저는 여기에
조금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술입니다.


술은 이상한 면죄부다

여기서 술의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량”이라는 건
굉장히 주관적인 개념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술을 네 병 마셔도 멀쩡한 사람이

“나는 술 한 잔만 마셔도 취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취했는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증명하기 어렵죠.

특히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더 그렇습니다.

“나 어제 뭐라고 했어?”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말을 들으면
상대방은 그 사람의 머릿속까지 들어가 볼 수가 없습니다.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기억은 나지만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저는 바로 이 애매함이
술자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술 한잔을 하는 것

평소에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못 하는 이야기.

친구에게는 괜히 자존심 때문에 못 하는 이야기.

부모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

누군가에 대한 뒷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술이 한잔 들어가면
이상하게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은 말이야.”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

그리고 재미있는 건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공식화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다음날이 되면,

“어제 내가 그런 얘기를 했나?”

“글쎄? 나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도요.


삶은 연극이다

여기서 아까 이야기했던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계속 역할을 맡고 살아갑니다.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역할을 하고,

가족 안에서는 가족의 역할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친구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맞는 말을 하죠.

그런데 가끔은
그 배역으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술자리가
잠시 무대 뒤로 빠지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사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사실 나도 힘들었어.”

“사실 그 사람이 조금 싫었어.”

“사실 네가 부러웠어.”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음날 다시 무대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배역을 다시 연기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둘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어젯밤 무대 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하지만 굳이 그것을 무대 위로 끌고 나오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

저는 여기에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은 게 아닙니다.

초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요.

이미 한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척해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그 사람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건
말을 듣지 않는 게 아니라,
말을 들은 뒤에도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눈치게임이 있습니다

물론 이게 모든 술자리에서 가능한 건 아닙니다.

여기서 굉장히 재미있는 눈치게임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지금 어떤 술을 마시고 있는 걸까?”

술의 종류 말고요.

이 사람이 지금 원하는 게 뭘까.

정말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냥 취하고 싶은 걸까?

그냥 놀고 싶은 걸까?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오늘만큼은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이걸 먼저 알아야 합니다.


술과 취함은 다를 수 있다

저는 술을 마시는 목적이
사람마다 굉장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술은 그냥 술입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즐기는 음료이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기 위한 도구이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취하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지러운 느낌.

평소와 다른 감각.

기분이 올라가는 느낌.

그 자체를 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죠.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술은
조금 다릅니다.

저에게 술은

취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가면을 벗기 위한 도구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건 도파민의 문제와도 닮아 있습니다

이건 제가 예전에 이야기했던
“도파민 목적자”라는 생각과도 조금 닮아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원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술을 마시고 → 이야기를 하고 → 서로 가까워지고,

였는데,

어느 순간

술을 마시고 → 취하고 → 더 강한 자극을 찾고,

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술자리가
관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극을 소비하는 공간이 됩니다.

물론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술자리에는 상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처음 이야기했던 문제로 돌아옵니다.

제가 술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술을 그냥
“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제 이야기는 짝을 찾지 못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술잔을 들었는데,

상대방은 그냥 즐겁게 취하려고 술잔을 든다면,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서로 다른 술을 마시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술자리에서
굉장히 미묘한 눈치게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반대로,

“나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도
내일 모른 척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걸 서로 확인하는 겁니다.


어쩌면 낭만의 시대에는

그래서 조금 재미없게,
아주 객관적으로 표현하면,

결국 이런 겁니다.

술을 마셨고,

술을 마셨다는 것을 당위로 삼아서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오갔고,

다음날에는
그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없던 일처럼 취급하는 것.

그런데 저는 이걸 단순히
“옛날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로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에는
그게 나름대로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던 시대에,

술 한잔이

“오늘은 조금 솔직해도 괜찮다.”

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술잔을 받아주는 사람이

“네가 오늘 한 이야기는
내일 네가 하지 않은 이야기로 해줄게.”

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해주는 것.

그게 어쩌면
그 시대 사람들이 서로의 속앓이를 풀어내던
하나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취함”

그래서 저는
술에 취한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비틀거리는 것.

말이 꼬이는 것.

기억을 잃는 것.

그것만이 취한 상태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말 취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 앞에서 가면을 벗었을 때
그 가면을 다시 씌워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내게 보여준 모습을
함부로 이용하지 않는 것.

그게 술에 취하는 것의
또 다른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솔직해지는 게 아니라,

술을 마셨다는 핑계가 있기 때문에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솔직함을 들은 사람이
다음날 모르는 척해주는 것.

그래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저는 어쩌면 그것이
술이라는 아주 오래된 도구가 사람 사이에서 해왔던
가장 낭만적인 역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누군가가

“한잔 할래?”

라고 말한다면,

그게 정말 술 한잔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오늘은 우리 조금 솔직해져 볼래?”

라는 뜻인지,

한번 생각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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